'할머니 시심'에 통영마을 웃음꽃 폈네 '마을 시집' 출간한 60~80대 늦깎이 시인들 시 쓰며 지난 세월 아픔 녹여 경남 통영시 사량도 아랫섬 양지리 능양마을에 사는 김덕명(70) 할머니는 산너머 읍동마을에서 열여덟 살에 시집왔다. 3년 만에 멸치잡이 배를 부리던 남편이 허리를 다쳐 몸져누웠다. 그 뒤로 19년 동안 남편의 대변 수발을 해야 했고 시어머니와 시아제, 시누이를 부양하며 여섯 남매를 키워냈다. "십구 년 동안/ 남편이 척추판 고정으로/ 누워 있었던 아랫목 빈자리에/ 효부상으로 받은 반상기를 꺼내본다/ 함께 밥상 할 남편도 없는데/ 이것이 십구 년의 보상인가/ 눈가에 이슬이 맺힌다…" 할머니의 자작시 '반상기의 고운 빛처럼'에는 스무 살부터 겪었던 가난한 시집살이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장석순(81) 할머니는 일제 강점기에 통영에서 여자 상업고를 졸업하고 상업은행에 다녔던 미모의 인텔리 여성이었다. 그러나 일본이 군 위안부로 처녀 공출을 하자 그의 부모가 여섯 살 위 가난한 섬마을 총각에게 서둘러 시집을 보냈다. "밥할 줄 모르는 새색시는/ 시댁 식구들이 내던지는/ 밥사발에 이마가 터지고/ 가냘픈 몸매에 큰 물독을 이고/ 지게 지고 나무하느라/ 고운 손은 거북이 손으로 변했다…" 통영시 가우치 선착장에서 뱃길로 40여 분을 달린 뒤 뭍에서 다시 산길을 30여 분 에돌아 닿는 작은 어촌. 순한 사슴을 닮았다고 해서 능양마을로 불리는 이곳에서 지난 30일 흐뭇한 섬 축제가 열렸다. 이 마을의 60~80대 늦깎이 남녀 시인 29명이 지난해 9월부터 배워온 시 공부를 바탕으로 틈틈이 써온 자작시를 낭송하는 자리였다. 이날은 또 어르신들의 시 43편과 수필 1편, 콩트 1편을 묶은 시집 <시가 흐르는 섬마을>이 나와 경사가 겹쳤다. 이날 마을 잔치는 올해 30돌을 맞은 통영의 유일한 연극단체 '극단 벅수골'(대표 장창석)이 마련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주최하는 생활문화공동체 만들기 시범사업의 도움을 받아 지난해 9월부터 벌여온 '섬 마을에 웃음꽃이 활짝 피네' 프로젝트가 비로소 결실을 맺은 것. 극단 벅수골의 장영석(61) 고문이 문학강사로 나서 매주 1박2일이나 2박3일간 섬을 찾아가서 이 마을에서 11년째 목회활동을 벌이고 있는 양지교회 정수덕(59) 목사와 함께 어르신들의 사연을 채록하고, 한글도 가르치면서 문학수업을 해왔다. 마을을 들어서자 마을 담벼락과 마을 앞 냉동 컨테이너 박스 벽에 풀로 엉성하게 붙여놓은 여러 시가 눈에 띈다. 비록 시구는 세련되지 못했지만 저마다 담긴 사연은 여느 이름난 시인의 작품보다 더 심금을 울린다. "조개를 판다/ 오금이 저린다/ 마늘을 심는다/ 복숭씨가 애린다/ 병원에 간다/ 조개 팔고 마늘 팔아도 병원비도 안된다/ 일하기 위해 병원 가는지/ 병원 가기 위해 일하는지/ …/ 오늘도 절름거리며/ 텃밭을 가꾼다" 박원선(71) 할머니의 시 '약이 밥이 되고'에는 평생을 바닷일과 밭일로 살아오다 말년에 중풍을 맞아 고생한 흔적이 마치 이녁의 주름처럼 켜켜이 쌓여있다. 오랜 공직 생활을 하다 정년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온 문삼홍(69) 할아버지는 "양지리 사람은 애환을 만들고/ 바다는 삼킨다./ 양지리 사람이 애환을 노래하면/ 바다는 듣는다.('시가 있는 내 고향')"며 고향 사람들의 힘든 애환을 들려준다. 또 이순선(70) 할머니는 어렸을 적에 마마를 앓아 결혼을 포기했는데 어느 날 등잔불에 본 선이 결혼으로 성사된 숨은 이야기를 시 '재봉틀과 등장불'에서 털어놓았다. 장중석(75) 할아버지는 자신이 20여년 전에 심은 동백나무 아래에서 커피를 마시다 고3 때의 첫 사랑을 떠올리며 쓴 '커피 잔에 어린 첫사랑'을 발표해 웃음을 짓게 했다. '열일곱 소녀'의 시인 장석순 할머니는 "시를 쓰면서 이런 세상을 산 과거가 생각나 눈물을 흘렸다"면서 "앞으로도 낮에 일하면서 생각해놨다가 밤으로 한자씩 적어나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시집 <시가 흐르는 섬마을>에 나란히 이름을 올린 부부 시인 장중석 할아버지와 박원선 할머니도 "열심히 시를 써서 많이 모이면 부부 시집을 내 볼 욕심도 있다"고 환하게 웃었다. 정수덕 목사는 "어르신들이 시를 배우고부터 표정도 밝아졌다"면서 "시를 통해 글을 알게 되고, 자기 삶의 궤적을 되돌아 보는 여유도 찾는 것 같다"고 귀띔했다. 늦가을 쪽빛 바다가 유난히 고운 능양마을에는 지금 시심이 활짝 피어나고 있다. 글·사진 정상영 기자 출처 - 한겨레신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