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모도 겨울바다… 황금개펄 쓸쓸한 '비움의 공간' 섬, 바다, 개펄, 산 등 때묻지 않은 자연이 어우러져 바다의 계절은 여름과 겨울 뿐이다. 여름바다가 채움의 공간이라면 겨울바다는 비움의 공간이다. 비움으로써 더 넉넉한 바다, 비움으로써 더 푸근한 바다. 그 넓고 깊은 모성애로 석모도의 겨울바다가 모든 것을 내어놓고 저만치 물러난다. 원색의 추억마저 파도에 휩쓸려간 빈 바다. 그곳에서 황금색으로 덧칠한 거친 질감의 개펄과 유려한 곡선의 갯고랑이 깊은 속살을 드러낸다. 석모도의 겨울바다는 쓸쓸해서 더 낭만적이다. 겨울바다로부터 초대장을 받은 젊은 연인과 아련한 추억의 그림자를 찾아 나선 중년 부부들이 카페리에 오른다. 잿빛 바다에서 휴식을 취하던 갈매기 떼가 어지럽게 날아오른다. 허공으로 날아오른 먹이를 잽싸게 낚아채기 위해서다. 새우깡 갈매기의 비행술에 놀란 연인들의 감탄사가 겨울바다에서 작은 동심원을 그린다. 인천시 강화군 삼산면에 속한 석모도는 강화도 외포선착장에서 서쪽으로 1.5㎞ 해상에 위치하고 있다. 석모도는 서울과 수도권에서 승용차로 2시간 거리인데다 섬, 바다, 개펄, 산 등 때묻지 않은 자연이 어우러져 연인들이 많이 찾는 낭만의 섬이다. 섬을 한바퀴 도는 19㎞ 길이의 일주도로를 시계바늘 방향으로 돌다 만나는 전득이고개는 석모도의 주봉인 해명산(327m) 산행의 출발점. 능선을 따라 걸으면 서해에 흩뿌려진 올망졸망한 섬들이 파노라마로 펼쳐져 마치 바다를 걷는 듯 착각에 빠지게 된다. 방개고개와 새가리고개를 지나 보문사로 하산하는 코스가 가장 인기 있다. 전득이고개를 넘은 일주도로는 매음리에서 어류정항과 민머루해변으로 이어지는 이색적인 풍광의 일직선 도로를 만난다. 도로 북쪽의 황량한 들판은 기러기들의 놀이터. 수확이 끝난 논에서 휴식을 취한 수천마리의 기러기 떼가 푸른 하늘과 저녁 노을을 배경으로 날아오르는 모습이 장관이다. 도로 남쪽의 광활한 간척지는 한때 서해안에서 가장 품질 좋은 천일염을 생산했던 삼량염전. 지금은 바닥이 거북등처럼 갈라지고 칠면초와 갈대가 우거진 폐염전으로 전락했다. 지난날의 화려했던 영광을 반추하듯 쓰러져가는 소금창고 한 채는 사진작가들의 단골 모델. 석모도에는 매음리의 삼량염전을 비롯해 석모리와 하리 일대에 광활한 들판이 바둑판처럼 펼쳐진다. 모두 섬과 섬 사이의 바다를 메워 만든 간척지로 석모도를 비롯한 강화도의 간척역사는 고려시대로 거슬러 오른다. 몽골 침입으로 강화도로 피난을 온 고려 조정이 식량을 해결하기 위해 간척사업을 펼친 것이다. 삼량염전도 1950년대에 보문선착장과 어류정항 사이의 바다를 매립해 만든 240㏊ 규모의 간척지. 오랜 세월 9개의 섬을 연결해 탄생한 석모도는 서울 여의도 다섯 배 크기로 늘어났다. 삼량염전 인근의 어류정항은 숭어 낚시꾼들이 많이 찾는 포구로 어선 이름을 딴 포장마차 횟집들이 겨울바람을 벗하고 있다. 확장공사가 한창인 어류정항은 물이 빠지면 드러나는 개펄의 곡선이 부드럽다. 게구멍이 숭숭 뚫린 개펄에 올라앉은 어선과 녹슨 닻은 한 폭의 풍경화. 석모도는 경관이 수려해 드라마와 영화 촬영장소로도 유명하다. 이정재와 전지현 주연의 영화 '시월애'는 섬 북쪽의 하리저수지 아래 개펄을 배경으로 삼았다. 개펄에 지어진 그림 같은 집 '일 마레' 세트는 몇 해 전 태풍에 파손돼 철거됐다. 지금은 세트가 있던 장소에 왕새우양식장이 들어섰다. 영화 속 세트는 사라졌지만 ‘이 사랑이 떠나지 않게 해주세요. 사랑이었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았습니다’는 대사를 기억하는 순정파 연인들이 하리저수지 주변을 맴돈다. 영화 '취화선'에서 장승업이 김병운 선생을 찾아다니던 중 추운 개펄에서 우연히 만나는 장면은 석모도 유일의 해수욕장인 민머루해변에서 촬영됐다. 민머루는 삼량염전에서 해수욕장으로 가는 고갯길에 민씨라는 사람이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머루는 마루(고개)가 변해서 된 말이다. 활처럼 휘어진 민머루해변은 폭 50m, 길이 1㎞의 모래사장과 드넓은 개펄로 이루어졌다. 조석간만의 차가 8m로 물이 빠지면 폭 1㎞의 개펄이 드러난다. 단단한 개펄은 게, 조개, 낙지 등 바다생물의 보고. 석모도를 비롯한 강화도의 개펄은 세계5대 개펄로 2000년에는 저어새 등 철새들의 서식지인 민머루해변 일대가 천연기념물 제419호로 지정됐다. 민머루해변의 개펄은 원적외선 방출량과 미네랄 성분이 많아 신경통과 피부미용에 좋다고 한다. '시월애'에 출연했던 이정재가 이곳 개흙으로 머드팩을 했다고 전해지면서 여름에는 많은 사람들이 몸에 개흙을 바르고 해수욕을 즐긴다. 해안선이 부드러운 민머루해변의 매력은 기이한 형태의 갯바위와 해수욕객들의 안전을 위해 설치한 2개의 나무 망루, 그리고 멀리 수평선을 수놓은 주문도, 아차도, 볼음도, 말도 등 점점이 뿌려진 섬들. 자연과 인공이 조화를 이룬 풍경을 한눈에 보려면 장구너머 포구 가는 길에 위치한 언덕에 올라야 한다. '바다의 마음'이라는 간판을 내건 횟집이 위치한 언덕에서 북쪽으로 산굽이를 돌면 나타나는 장구너머 포구는 산마루가 장구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아담한 포구에는 개펄에 갇힌 어선들을 배경으로 횟집과 찻집이 발길 뜸한 겨울손님들을 기다리고 있다. 망둥어 낚시터로도 유명한 장구너머 포구도 물이 빠지면 게와 조개 등을 잡을 수 있는 개펄체험장으로 변신한다. 하루 종일 은회색으로 반짝이던 민머루해변이 탈색한 흑백사진처럼 누렇게 채색된다. 핏빛 태양이 한 뼘씩 수평선을 향해 가라앉을 때마다 바다가 조금씩 뒷걸음질을 한다. 태양과 수평선이 가까워질수록 바다의 색깔이 누런색에서 황금색으로 점점 화려해진다. 이윽고 빨갛게 물든 태양이 주문도의 살꾸지와 석도 사이로 가라앉기 시작한다. 깨진 거울 파편처럼 반짝이던 민머루해변의 개펄도 황금색으로 물든다. 서해안 3대 낙조로 손꼽히는 석모도 민머루해변의 해넘이가 완성되는 순간이다. 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출처 - 국민일보 ▼